나 자신을 조금 더 드러내기
부끄러움은 나의 몫
문뜩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의 기억, 수치심은 너무나 명료하고 잊기 힘든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특히나 나의 잘못이 아니라 생각되는 기억은 더욱 고통스럽다. 부끄러움과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이런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은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탓하며 앞으로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 그런 순간을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런 다짐은 스스로를 소극적으로 만들어 간다. 내면의 불안이 타인의 인정에 목매달게 만들지만, 그 불안 때문에 내면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방어적 자세는 오히려 우리를 더더욱 고립시키고, 또 다른 후회의 순간을 만들 뿐이다.
‘나는 왜 유독 부끄러움을 잘 느낄까?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 것 같은데, 모든 순간을 의연하게 이겨내는 것 같은데, 왜 나만 그럴까? 나의 타고난 기질 탓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답이 없는 질문에서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한다면, 이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뿐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무수오지심 비인야 <無羞惡之心 非人也>’ 맹자의 말이다. ‘악한 일을 행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 부끄러움은 선한 사람의 원초적인 감정이다. ‘수오지심 의지단야 '<羞惡之心 義之端也>`’,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옮음의 극치이다.’ 오히려 부끄러움은 이타적인 것이다. 반복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배려의 마음인 것이다. 맹자의 말마따나 부끄러움이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왜 이렇게 괴로운 것일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부끄러움 때문에 많은 기회를 놓치는 듯 하다.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될까? 혹여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진 않을까? 인사를 건넸는데 무시하면 어떡하지?’ 우리는 우리의 좋은 면을 보지 못하고, 낯선 것들에 민감하다. 과한 부끄러움은 우리를 단절시킨다.
그러면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순간과 아닌 순간의 구분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세상의 문화와 질서, 세속의 요구로 인한 도덕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구분이 있는 듯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그런 경계에서 우리는 세상과 자아와의 묘한 어긋남과 괴리감을 느끼게 되고, 나 자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절망감이 찾아온다.
자신을 조금 더 드러내 보자.
그렇다면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명하게 구분 지을 수 있다면, 불필요한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게 가능은 한 것일까?
나는 자아와 현실의 괴리감을 느끼는 경험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는 성장을 할 수 있다 믿는다. 그리고 그 성장을 통해 도덕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행위는 그저 의미 없는 부차적인 행위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의무가 있을 뿐 그 어떤 다른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안에서 확고해지고, 자기 자신의 길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그러니 우리는 먼저 웃고, 먼저 배려하고, 먼저 사랑함으로써 부끄러움을 경험해야만 한다.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과 같은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수치심 그 자체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우리의 고통을 줄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