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 데이지는 시초지로 떠나는 사람들이 잊혀지는 것에 의문을 갖는다.
- 시초지에 갔다 돌아온 사람의 불행하게 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 금서구역에서 올리브와 릴리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 이야기를 들은 데이지는, 나이가 차지 않았음에도, 시초지로 떠나게 된다.
- 많은 사람들이, ‘완벽한’ 마을을 떠나, 지구로 간다.
- 불행없는 삶, 고통없는 삶이란 완벽한 삶인가?
- 진정한 사랑은 그 자체가 고통이 아닐까?
- 그냥 어쩌다고 본 영상에서 말하던 것
- 재난, 고난, 수난. 이 세 난이 없는 삶이 바로 ‘무난’
- 어제 본 ‘셀 위 댄스’라는 영화가 생각남. 무난한 삶을 살아가는 가장의 일탈?
- 무난한 삶이 주는 불행..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노인, 안나는 한 때 딥프리징 기술을 연구하던 연구원이었다.
- 그녀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슬렌포니아 제3행성’으로 개척 이민을 갈 생각이었다.
- 남편과 아이를 먼저 그 행성으로 보냈고, 딥 프리징과 관련된 본인의 연구를 발표하기 위한 최대 규모의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서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기간, ‘웜홀 버블’이라는 것이 발견되면서, 슬렌포니아 행성은 ‘가까운 행성’에서 ‘먼 행성’으로 전락하였고, 기존의 기술은 ‘워프 항법’을 통해서 먼 행성으로 떠나는 우주선은 사라지게 되었다.
- 컨퍼런스 전날 컨퍼런스 당일 발표일과 슬렌포니아로 떠나는 마지막 우주선의 출항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안나는 컨퍼런스와 마지막 출항 시간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마지막 우주선을 놓치고 말았다.
- 한 민간단체가 생 이별을 하게 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우주선을 띄어주기로 하였지만, 지구와 행성을 오가는 긴 출장을 담당할 승무원이 없었기에, 우주선은 몇 달, 몇 년에 한 번 출항을 하였다.
- 안나는 본인의 출항 순서를 기다리면서, 계속해서 정류장에 남아있었다. 냉동 수면 기계 안에서. 종종 자신의 차례가 왔는지 알기 위해서 깨었을 뿐이다.
-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정류장은 이미 폐쇄되었으며, 슬렌포니아로 떠나는 우주선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 안나를 슬렌포니아에서 기다리는 남편과 아이를 생각하면 미안한 감정이 클 것이고, 그게 내가 컨퍼런스를 포기하고 떠났다면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기에, 스스로에게 더 큰 죄책감이 들 것같다.
- 민간단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깔끔하게 남편과 아이를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오히려 민간단체의 도움 때문에, 헛된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안나의 인생 자체가 무너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관내 분실
- 임신을 한 지민은 자기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깊은 유대감,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 아이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건강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자신 때문이라는 복잡한 감정이 이어지면서, 죽은 엄마에 대한 부재가 지민을 덮친다.
- 그렇게 엄마를 만나기 위해 도서관(죽은 사람의 정신을 데이터로 저장하는 공간)에 방문한다.
- 하지만 엄마는 관내분실 상태가 되어있었고, 엄마를 찾기 위해서 떨여져있던 동생, 아빠를 만난다.
- 그들을 만나며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녀가 생전 세상에서 잊혀져 간 존재가 되어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엄마를 이해한 지민은, 도서관에서 다시 찾은 엄마를 만났고, 용서를 할 수 있었다.
→ 작가의 말 : 세상 어딘가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
❗️내가 이 부분을 고른 이유!
- ‘관내 분실’을 읽으며 약간 부정적인 감정이 생겼음. 아무리 ‘부모’라지만, 상처를 준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강요하려는 것으로 느껴졌음.
-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스스로 용서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음.
- 항상 ‘용서’를 생각하면 스스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 나는 아직 ‘본인 스스로를 위해서 용서하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용서란 무엇일까?
- 용서의 과정이 완료되어도 용서받은 당사자를 신뢰할 필요는 없다.
- 살아온 환경 때문에 그 사람의 부적절한 행동을 용납할 필요는 없다.
- 용서는 상대편이 여러분의 감정을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 용서한다고 해서 용서받은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다.
- 용서는 용서받은 사람의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 수양의 최고 단계를 바로 ‘용서(容恕)’ 라고 말한다. ‘서(恕)’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그저 덮어주는 행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지혜다. 내 처지가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 즉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용서는 잘못을 잊어버리는 망각이 아니고 타인에게 베푸는 자선의 개념도 아닙니다. 스티븐 체리 신부는 ‘용서라는 고통’에서 용서는 화해와도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용서한다고 해서 상대방과 다시 예전처럼 지내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고 용서는 새로운 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용서에 이르는 열쇠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어난 일은 여전히 당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당신이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의식적으로 용서해주면 과거는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있기는 하지만 있어야 할 곳, 즉 과거로 '추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