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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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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달래줄 위안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참된 행복은 위안이나 고통의 영역을 넘어선다. 지팡이나 다른 연장의 끝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 원래의 촉각과 다르듯이, 참된 행복은 다른 감각으로 감지된다.
 
자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빼앗을 수 없다. 단 한 가지, 극단의 불행만이 예외다. 밖으로부터 ‘나’를 파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불행 때문에 밖으로부터 ‘나’를 파괴당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무신론 혹은 유물론의 개념으로서의 소멸뿐이다.
 
행동의 결과들에 연연하지 말 것. 그런 숙명에서 벗어날 것.
목표를 위하여 행하지 말고 필연에 의하여 행할 것. 할 수 밖에 없다. 행동이 아니라 일종의 수동이다. 행하지 않는 행동.
 
어떤 의미에서는 노예가 가장 좋은 예이다. … 행동의 동인을 자기 밖으로 옮길 것. 그것에 떠밀릴 것. 진정으로 순수한 동기는 밖의 것이다.
 
겸손의 목적은 영적 성장에 있어서 상상의 것을 파괴하는 데 있다. 실제 성장하면서도 자신이 한참 멀었다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빛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고, 그 빛의 근원은 사람들의 의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 큰 불행

너무 큰 불행에 빠진 인간은 연민조차 얻지 못한다. 혐오, 두려움, 경멸이 있을 뿐이다. 연민은 어느 정도까지만 내려가고, 그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빈자리를 채우는 상상력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승리할 명분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감수할 수 있지만, 패배할 명분을 위해서는 그럴 수 없다. 초인만이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 것을 위해 죽음을 감수할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평형추를 필요로 하지만, 은총이 아닌 평형추는 모두 거짓말이다.

고통과 피로

고통과 피로가 너무 심해서 우리 영혼 안에 그 상태가 끝없이 이어지리라는 느낌이 들 때, 그 끝없음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면서 응시하면 우리는 뜯겨 나와 영원에 이르게 된다.

악과선

열등한 덕은 선의 타락한 형상이다. 그런 덕은 위우침의 대상이다. 악을 뉘우치기보다 어렵다. 바리사이와 세리.

1이 신이라면 무한은 악마다.

인간의 비참함 안에는 신의 지혜의 비밀이 들어 있다. 쾌락은 다르다, 쾌락의 추구는 인공 낙원과 취기의 추구이고 성장의 추구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헛됨을 겪게 할 뿐이다. 우리의 한계와 비참함에 대한 응시만이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갈 수 있다.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쉽게 상처받아서 아름답다. 그것은 존재한다는 징표이다.
 

애덕과 불의

애덕과 불의는 읽기들을 통해서만 규정된다. 따라서 정의 내릴 수 없다. 착한 도둑의 기적은 그가 신을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