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달 전쯤, ‘최성운의 사고실험’이라는 채널에 제가 존경하는 이동진 평론가가 출연한 편이 있었는데요, 그 때 영상을 보고 내용이 뇌리에 박혀 제 무의식을 항상 맴돌았어요.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처음 들었을 땐 여운이 없었는데, 되는대로 사는 것이 충격적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이동진 평론가의 말씀이라 그런건진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무의식 적으로 반추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최근 ‘죽을때 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 - 기시미 이치로’의 책을 읽고, 이동진 평론가님의 말씀을 통해 ‘꿈’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꿈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 역시 이동진 평론가님과 같은 믿음이 있었어요. 성실하게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어느 한 지점에 도달할 것이란 믿음이요. ’꿈’을 향해 성실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간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죠.
그런데 성실히 걸어온 길을 되돌아 봤을때, 오히려 꿈과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성실하게 걸어온 길의 반대편에 내 꿈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세월이 지나며, 과거엔 중요하고 가치있다 여겨졌던 것들이, 지금은 오히려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 그리고 가치있는 것을 좇으며 살았던 성실한 세월은 허송세월이 되고마는 것. 그 때의 좌절감은 마치 ‘꿈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일 것이에요.
그렇다면 꿈은 독일까요? 이룰 수만 있다면 좋은 동기부여의 매개가 되어 줄 테지만,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깐요.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광기의 산물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이 그러한 일을 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죽을때까지 나를 다스리는 법>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꿈을 꾸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꿈을 꾸는사람들을 위해서 꿈을 꾸지 말라고 해야할까요?
저는 불가능 한 것을 추구하는 것을 꿈으로 포장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즉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것’과 ‘꿈을 가지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꿈이란 것은 대부분 멀고 높은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꿈이 되는 것이기도 하구요. 저는 노력을 열심히 한다는 의지만으론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고 생각해요.
이동진 평론가님의 말마따나, 넓은 시간을 인간이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멀리 있는 꿈을 향해 다가간다고 당장은 느껴질 수 있지만, 또 언제 그 꿈이 희미해질진 미지수에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거엔 중요했던 것들에 의미가 사라지고, 노력은 후회가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좌절하는 경우가 비일이재 하죠. 오히려 꿈을 가졌기 때문에, 성실했기 때문에 꿈과 멀어지는 것이죠. 이는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지고, 흔히들 말하는 ‘번아웃’의 상태, 무기력의 상태로 이끌게 될 수 있죠. 악순환의 시작이죠.
꿈을 꾸었고, 성실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란 아이러니죠.

그런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결심을 해야할까요? 저는 ‘단념’할 결심이라고 생각해요.
단념이란 단어는 언뜻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에요. 하지만 단념이 <죽을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 - 기시미 이치로> 책을 읽고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되었어요.
단념하는 것을 정말로 알고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희망할 수 있다. 아무것도 단념하기를 희망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희망도 품지 못한다. <죽을때까지 나를 다스리는 법>
단념은 긍정의 한 종류라고 생각해요. 단념하는 것으로, 조금더 유연한 삶을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닌,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관점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인생 전체를 되는 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즉 단념을 통해 내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믿어요.
저는 꿈을 가지고 싶기에 단념하려고 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좇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진정한 꿈을 가지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