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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 사회에서의 ‘해피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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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또 다른 형태의 파시즘일까?

우리는 파시즘하면, 옛 군국주의를 떠올리곤하며 부정적 이미지를 상상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영화 해피엔드를 보고나면 현대의 자본주의역시 또 다른 파시즘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파시즘이란, 집단에서의 개인의 사고를 획일화 하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과정에서 창의성은 억제되고,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해지며, 강력한 ‘담론’이 생겨난다.
 
영화 <해피 엔드>내에선 다양한 권위구도가 나타난다. 교장과 선생, 선생과 학생, 교장과 학생, 경찰과 학생 등, 이러한 권위구도에서 무조건적 탄압은 영화상에서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행위에는 납득 가능한 이유가 있다. 즉 담론이 형성되어 있다.
권위 구도에서의 미묘하게 그 선을 넘나드는 행위를 통해서 자본주의가 파시즘의 형태로 작동되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가령 도를 넘은 학생들의 장난으로 인해 ‘판옵티’라는 감시 체제를 구축한 교장, 시위를 탄압하는 경찰,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재일교포와 같은 나름의 이유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게 된다.
 
판옵티콘
판옵티콘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 한다면, 처벌 방식은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다. 권력의 작동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이에 따라서 우리의 처벌과 규율에 대한 방식도 달라진다는 것.
18세기 이전에는 처벌이 '공개 처형'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왕의 권력을 과시하고 민중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스펙터클'이었다. 18세기 말부터 공개 처형이 사라지고 '감옥'이 등장하면서 처벌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19세기 이후 현대적 감옥 시스템의 등장으로 처벌의 목적이 '보복'에서 '교정과 개조'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처벌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 처벌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푸코는 현대의 처벌을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개인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규범화하는 과정이라 말한다. 즉 판옵티콘으로 상징되는 감시 체계를 통해 개인의 영혼을 훈육하고 순종적 주체로 만드는 권력 기술이라는 것이다.
 
영화 <해피엔드>의 AI 감시 시스템 Panopty
영화 <해피엔드>의 AI 감시 시스템 Panopty
감독 네오 소라는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미래의 일본은 어떤 사회가 되어 있을까를 상상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다소 일본 비판적 영화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구도가 일본에 국한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는 광기를 정의한다. 영화에서도 AI 감시 시스템 Panopty를 통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한다. 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교묘하게 사각지대에서 사회적 담론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더라도 처벌받지 못하는 반면, 특수한 상황에서의 합리적 행동 역시 기준에 어긋난다면 처벌받는 대상이 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엄격하다. 반대로 묵시적인 것들엔 관대해진다.
 
그러면,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적인것인가? 미셸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 즉 특정 시대의 지배적 담론이 ‘정상’의 경계를 그으며 그 바깥으로 밀어낸 것들이 ‘비정상적인 것’이라 말한다.
우리는 과거의 파시즘, 즉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한다. 하지만 그 때의 담론이 형성된 사회에서 군국주의를 비난하는 사람은 과연 그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게 될 것인가. 만약 미래의 세대가 지금의 우리 한국 사회를 야만스러운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지금은 무시받는,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은 위인으로 취급될까?

한국 사회에서의 광기

홉스테드 문화차원이론 독일, 일본, 한국, 미국의 수치표
왼쪽 순서대로 권력거리, 개인주의, 성취동기, 불확실성 회피성향, 장기지향성, 관용성
홉스테드 문화차원이론 독일, 일본, 한국, 미국의 수치표 왼쪽 순서대로 권력거리, 개인주의, 성취동기, 불확실성 회피성향, 장기지향성, 관용성
위 표는 홉스테드의 문화차원이론으로, 한국은 권력거리(60점), 불확실성 회피성향(85점), 장기지향성(86점) 지표에서 높은 수치를 보였다. 반면 개인주의(58점), 성취동기(39점), 관용성(29점)에서는 현저히 낮은 점수를 기록했다.
특히 개인주의 지표에서 한국(58점)은 독일(79점)이나 미국(60점)보다 낮고, 또 관용성은 독일(40점)이나 미국(68점)에 비해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반대로 불확실성 회피성향은 85점으로 독일(65점)이나 미국(46점)보다 훨씬 높아,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치들은 한국 사회가 위계질서를 당연시하고, 집단 내 일체감을 중시하며, 예측 가능한 삶의 패턴을 선호하는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한국 사회 ‘정상’의 범위가 좁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모난 것들은 정상의 경계를 벗어나게 된다. 비교적 순종적 사람들이 정상으로 취급받는 사회, 즉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비정상인들은 넘쳐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어느 학교 나왔어요?”라고 물었을 때, “고등학교 밖에 못 나왔어요”라고 말한다면 ‘당연히 나와야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라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은 우리 사회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면, 이는 비정상이라는 무의식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는 민주적인가? 한국 사회는 제도적으로 민주적이라고 생각한다만, 강하게 뿌리잡은 문화는 민주적이라고 보기엔 힘들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빨리 발전하였기에, 정상적인 담론을 구성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 즉 결함이 있는 민주주의라 생각한다.
 
지금 시대의 세대갈등은 문화적 권위주의를 해결하지 못한 것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일상적 문화에서 권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의견을 제시하거나, 존중하는 문화가 결핍되어 있다. 이는 정량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복합적 문제이고,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즉 Panopty의 사각지대에서 나타나는 문제가 우리 사회의 신뢰를 천천히 무너뜨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 결국 양심에 달렸다.
 
영화 <해피엔드>
영화 <해피엔드>
그래서 우리는 해피엔드를 맞을 것인가, 해피의 엔드를 맞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