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 알랭 드 보통
책이란 우리가 습관 속에서, 사회 속에서, 결함 속에서 표출하는 자아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자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글이란, 또 다른 자아의 산물이다. 시간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글은 언제나 수정이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를 더 완벽하게 만들어 주면서, 우리와 다른 새로운 자아를 만든다. 본인을 날카롭게 다듬으며 쓰여져 가는 글은 본인의 모습을 하지않는다.
그래서 나는 글이 좋은 것 같다. 산발적인 내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혹은 스스로를 완전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거를 수 있는 촘촘한 그물.
그러나 다른 결혼을 내릴 수도 있다. 사람들을 구별하는 일을 그만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잘 구별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련된 귀족의 이미지는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위험스럽게도 단순 한 것일 뿐이다. 세계에는 물론 우수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성서를 기초로 편리하게 그들을 찾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낙관이다….. 귀족이라는 범주는 너무나 조잡한 그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다. 집단의 통계를 개인에게 접목시키는 ‘만행’.
심지어. 오늘날에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고작 단편적 사실을 타인에게 접목시키고 우월감을 느낀다. 이것은 만행이다.
절대적으로, 집단의 통계는 촘촘한 그물망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그물을 사용한다면 원하는 것을 거를 수 없다.
셋, 여유 있게 사는 법. 43p.
장밋빛 비단을 씌운, 아주 견고한 새 팔걸이의자 사이에 있는 금속으로부터 나온 듯한 소파와, 인간처럼 과거의 기억을 갖추었기 때문에 인격적인 존엄성으로 고양된 트럼프놀이 탁자 위의 양단 탁자보가, 콩티 선창가의 싸늘함과 어두움 속에서도 코타르나 바이올리니스트가 함께 어울려서 트럼프놀이를 하는 시각까지 꽃핀 정원의 저쪽, 깊은 골짜기가 하루 종일 보이는 몽탈리베 거리의 창과 라 라스플리에르의 유리문을 넘어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에 그을린 자국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제는 죽고 없는 친구 화가의 선물이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그의 삶이 남긴 단 하나의 파편인 옅은 색의 제비꽃과 삼색제비꽃 다발은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주의 깊고 온화하던 눈길과, 잘 생기고 통통하지만 쓸쓸했던 손을 화상시키며 그의 위대한 재능과 오랜 우정을 집약해 보여주고 있고, 도처에서 숭배자들이 집 안주인에게 보낸, 시간이 흘러서 하나의 고정된 성격, 하나의 운명적인 모습을 띠게 된, 예쁘면서도 무질서하게 놓인 선물들, 그리고 시골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개화된 수많은 다발, 초콜릿 상자들, 그리고 아직도 포장 상자에서 갓 나온 것처럼 새해 선물로 받은 처음 그대로 영원히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독특하고도 쓸데없는 물건들의 신기한 혼합, 간단히 말해 이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로부터 격리될 수 없었으나, 베르뒤랭네 집 잔치의 오랜 상객인 브리쇼에게는 영적인 도플갱어가 달라붙어 일종의 깊이를 얻게 된, 고색창연하고 부드러운 빛깔이 나는 것이었고, 이 모든 것은 실로 그의 가슴속에 소중한 비슷함과 혼란된 추억을 일깨우는 흩어진 감정의 편린들로 그의 주변을 울리고 있었으며, 그러한 추억은 화창한 날 한 줄기 햇빛이 대기의 한 부분을 오려내듯이, 그 추억들로 얼룩진 이 순간의 응접실 속에서 가구와 카펫을 오려내고, 규정하고, 한계 지으며, 쿠션에서 꽃병, 걸상에서 은은한 향기, 조명시설에서 빛깔의 주조까지 생기도록 조각하고, 자아내고, 집어넣고, 불러 놓고 있었는데, 그것의 한 형태는 사실 연달아 바뀌었던 베르뒤랭네 집 각각에 내재하는 그 응접실에 내재하는 이상화였다.
다섯, 감정을 표현하는 법 120p.
프루스트는 왜 이런 구절들에 그렇게 신경을 썼던 것일까? 그가 살던시절 이후로 사람들이 쓰는 말이 다소 바뀌기는 했지만, 위의 표현들이 상당히 진부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얼굴이 굳어버린 것은 문법에 대한 불만보다는 심리적 태도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프랑스어로 말할 때 짤막한 영어를 남발하고, 영구 대신에 흰 섬에 대해 말하고, 지중해 대신에 그랑 블뢰 에 대해 말하는 것은, 1900년 무렵에는 똑똑한 지식인처럼 보이고 싶은 소망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본질적으로 불성실하고 과도하게 다듬어진 우둔한 구절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모든 영국적인 것에 의지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떠날 때 바이바이! 라고 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장대 같은 비가 온다”와 같은 구절에는 “바이바이”와 같은 허식이 전혀 없지만 그것은 가장 진부한 문장에 속하며, 이런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을 함축할 뿐이다. 프루스트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것은 표현에 대한 좀더 정직하고 정확학 접근법을 옹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정직”함을 표현하는 것이 프루스트의 가치관이었을까?
여섯, 좋은 친구가 되는 법
책은 산발적으로만 활동하는 우리 정신의 정수이자 가장 활력 있는 표현의 기록이고, 원래는 수년간 지속되었지만 중간 중간 단절되었던 착상의 순간들의 연속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책의 저자를 만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만남은 시간적 한계에 종속된 상태에서 그 사람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일곱, 일상에 눈 뜨는 법
빵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이상한 일에 주목하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뭐라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리고 즉시 삶의 부침이란 나와 무관한 것이 되었고, 삶이란 재앙은 무해한 것이 되었으며, 삶의 덧없음은 허구의 것이 되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가 평범하고 우발적이고 소멸할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자발적인 기억, 지성과 눈으로 하는 기억은 오직 나쁜 화가의 그림이 보여주는 봄이 살아 있는 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와 닮지 않은, 부정확한 과거의 그림만을 우리에게 줄 뿐이다. ….. 그래서 우리는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를 회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도취시켰던, 오랫동안 잊었던 냄새를 맡게 되지 않고서는, 또는 비슷하게 , 우리는 더 이상 죽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물을 터뜨리게 하는 낡은 장갑과 우연히 마주치지 않고서는.
그러나 다른 결혼을 내릴 수도 있다. 사람들을 구별하는 일을 그만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잘 구별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련된 귀족의 이미지는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위험스럽게도 단순 한 것일 뿐이다. 세계에는 물론 우수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성서를 기초로 편리하게 그들을 찾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낙관이다….. 귀족이라는 범주는 너무나 조잡한 그물이기 때문이다.
여덟, 행복한 사랑을 하는 법
… 비록 알베르틴은 공작부인보다 옷이 훨씬 적지만 옷에 대한 이해 능력, 감상 능력, 그리고 애정은 공작부인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가난은 부유함보다 더 많는 것을 베풀며, 여성들에게 그들이 형편이 안 되어 살 수 없는 옷들보다도 훨씬 더 큰 것을 선사한다….
아홉, 책을 치워버리는 법
… 독서는 정신적 삶의 문턱 위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성하지는 않는다.